본문 바로가기

2017 국정감사

노회찬, “‘판결기록은 없는데, 전과만 있다’4.3사건 불법구금 피해자들, 신속한 재심개시 필요하다”




노회찬, “‘판결기록은 없는데, 전과만 있다’4.3사건 불법구금 피해자들, 신속한 재심개시 필요하다
- 4.3사건 불법구금 피해자증언 및 전과기록 등 증거자료 공개

- 4.3피해자들,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0년까지 징역

제주지법, 형식절차에 매달리지 말고 역사적 반성 차원에서 재심 개시해야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창원 성산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26일 제주지방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4.3사건 불법구금 피해자들의 증언과 전과기록 등을 공개하고, 지난 419일 제주4.3사건 중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하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불법구금 피해자들이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청구를 했지만, 법원은 아직 본격적 재심절차에 돌입하기는커녕 재심개시결정조차 내리지 않았다,

 

“2003년에 이미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에 대해 사과한 만큼, 신속한 심리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노회찬 원내대표는 “4.3사건 피해자들은 짧게는 1, 길게는 30년 가까이 구금되었지만, 판결문을 봤다는 사람은 없다. 전쟁터에서 즉결처분 하듯 처리되고, ‘당신은 몇 년이다라고 구두로 통보받은 게 전부이다 라며, (##피해자, 경찰 증언 별첨)

 

그러나 피해자들이 재심청구를 위해 조회한 자료에 따르면, ‘수형인명부에는 피해자들의 이름이 전부 남아 있고, 일부 피해자들에게는 전과기록도 남아 있다.”라고 지적한 뒤

 

최인석 제주지방법원장에게 판결문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재심사건 개시를 미룰 것인가? 이 사건 처리와 관련해서는 형식절차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두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다.

 

최 법원장은 법무부·경찰청 등에 사실조회를 하고 있는 중이라며, “(판결문이) 존재하지 않아서 나올 수 없다면 빨리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재판장 입장에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노회찬 원내대표는 적극적으로 사실관계를 검토해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


노회찬_국감보도자료_4_3사건_신속한_재심개시결정촉구.pdf


 

< 피해자들의 증언 >

제주 4·3도민연대가 피해자들을 직접 면담하여 작성한 녹취록

 

피해자들의

구금 경위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9. 7. 7. 선고, 전주에서 징역 7

나는 당시 열아홉 살이어서 나이가 젊어서 내려가면 죽여 버린다는 소문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산에 계속 숨어 지내고 있었다.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소문을 듣고 19494월 무렵 귀순해서 내려왔는데 체포당하였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9. 7. 5. 선고, 인천에서 징역 7

와산리에 살다가 해변마을로 피난을 갔다. 방목하던 소와 말이 걱정되어 와산 집으로 올라왔다가 군인들의 쏜 총에 허벅지를 맞았다. 숨어 지내다가 춥고 배고파서 함덕리 헌병대에 19494월경 자수했는데 군인들은 빨갱이라며 나를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주정공장에 갇혔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9. 7. 2. 선고, 대구에서 징역 15

토벌대가 마을을 다 태워버려 피난을 갔다가 한 7개월 정도 산에서 숨어 살았다. 1949510일 날 투표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내려와서 투표라도 하면 신상에 도움이 될까 하여서 내려왔는데 투표도 못 하고 잡혔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매질과 고문으로 몇 번 죽다 살아날 만큼 힘들었다.

피해자들에

대한 수사 중

고문 사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9. 7. 5. 선고, 인천에서 징역 7

처음, 애월읍 엄쟁이(신엄) 지서에 잡혀가서 아무 것도 묻지도 않으면서 머리를 아무데나 마구 부딪치게 하면서 무조건 때렸다. 코에서 피가 흥건했다. 쓰리쿼터에 태우고 어디로 가길래 죽이러 가는 줄 알았는데 제주시 농업학교에 수용시켰다. 산에는 왜 갔나?’ ‘ 가서 뭘 했나?’ ‘지서 습격은 했나?’ 등을 반복해서 물었고, 사는 곳이 소길이고 밭에 간 거라고 해도 무조건 때렸다. 무지막지하게 맞았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8. 12. 28. 선고, 마포에서 무기

유치장에 갇혀있으면서 조사받으며 고문도 당했다. 경찰이 하는 말이 우리 동네 사람이 나보고 남로당 부위원장이라고 했다. 나를 밀고한 그 동네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 해 나는 유치장에서 큰소리로 울며 동네사람들 나와서 바른대로 말하라고소리쳤다. 나는 계속 결백을 주장했으나 이 과정에서 매도 맞고 고문도 받았다. 참으로 억울하고 지금도 원통하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8. 12. 28. 선고, 전주에서 징역 1

1948년 음력 1111. 산에서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잡혔다.

서귀포 경찰서에서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고문도 받았고, ‘비행기 태우기라고 해서 의자에 올라가게 한 뒤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줄을 매달아 높은 곳에 연결하고 의자를 빼버리면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는데 어깨가 끊어지는 것 같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피해자들이

재판을 받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형을 통보받은

사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8. 12. 27. 선고 대구에서 징역 5

1구경찰서(제주경찰서)에서 200여 명이 한꺼번에 강당에 모여서 군인인데 계급은 잘 모르겠다. 군인은 재판할 때 무조건 통과, 통과라고 했다. 군인 옷 입은 사람이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란 딱지 붙은 중령인가 소령이 가운데 앉아있던 사람이 재판장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처럼 판사, 변호사, 검사가 있는 재판이었다면 내가 5년 형을 받을 리가 있나?

그런 재판이 끝나고 방에 들어와 보니 보초 서는 사람들이 너희들은 재수 좋았다. 여기 없는 사람들은 죽으러 갔다라는 말을 했다. 사형 당한 것이다. 194812월 인천형무소 수감되고서야 형무소에 온 줄 알았고 형무소에 와서야 형량도 알았다.

OO

전과기록(경찰청) 1949. 7. 2. 선고, 국방경비법위반 무기징역

법원 같은 곳에서 재판을 받는다고는 했는데 열 명 내지 열다섯 명 정도씩 긴 의자에 앉아있으면 군인복장을 한 사람이 그중에 대표 한 명한테만 뭐라고 물어보고 끝냈다. 그 대표로 질문을 받은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말할 기회도 얻지 못했고 형량도 듣지 못했다.

마포형무소 앞에서 우리를 인솔해 간 경찰이 너도 무기, 너도 무기, 전부 무기징역이라며 말해주었고 그때서야 내 형량을 알 수 있었다.

OO

수형인명부 기재: 1949. 7. 3. 선고, 대구에서 무기

모였던 장소는 주정공장은 아니었고 이동을 했는데 잘 모르겠다. 몇 백 명 모아놓고 이름을 부르고 어느 마을 누구냐고 물어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앞에 선 사람이 OO’ 부르면 내가 남원면 한남리 몇 번지입니다이렇게 대답을 했다.

형량을 듣지 못하고 대구형무소에 갔다. 형무소에 가서도 죄명과 형량을 모르니까 간수들이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왔느냐고 나무라면서 국방경비법 3233조 위반이라고, 징역15년이라고 얘기해주었다.

 

 

< 경찰 측 증언 >

제주 4·3사건위원회가 2001~2002년에 채록한 증언

(행정자치부의 열람허가에 따라 변호인들이 복사한 부분)

 

피해자들에

대한 고문 사실

OO” 증언: 1945년부터 1960년까지 15년간 제주경찰서에서 근무하였고, 1948년말경에는 1948년 군법회의에 회부된 주정공장 수감자들을 조사

동문동 주정공장에 귀순자들 많이 내려 온 때 내가 함덕 사람들을 많이 살렸어. 그때는 특별수사대 1개 반장이었지. 경사였어.

우리는 거기에 가서 하나씩 부르면서 조사를 하지. 거기 수사대 조사하는데가 있었어. 우리도 고문할 때는 하는데 될 수 있으면 안하지. 고향사람들인데 그걸 어떻게 때리면서 할 수 있어? 육지에서 온 경찰들은 고문을 많이 했어. 고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여자들은, 어떤 친구들은 옷을 다 벗겨가지고 천장에 매달아버린다니까. 고문하는 것을 봐도 높은 사람들은 말을 안해.

피해자들이

재판을 받지

못한 사실

OO” 증언: 1947. 6.경부터 제주경찰청 사찰과에서 5년여를 근무하면서 1948. 11. 17. 계엄령 선포 이후 동척회사에서 귀순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

계엄령이 선포되고 나서, 그때 동척회사 창고에 귀순자라고, 소위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중산간 사람들이 내려올 직전이라. 재판과정-계엄령 당시엔 재판 없어.

(재판을 안받고 형무소 갔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지. 계엄령 당시인데, 계엄령으로 재판이 뭐가 있어?

(그럼, 재판형식이 전혀 없이 형무소에 갔는가?)

그렇지.

피해자들이

재판정이 아닌

형무소에서

형을 통보받은

사실

OO” 증언: 제주4·3사건 당시 제주 경찰로 근무하였고, 이후 1948년 군법회의 피고인들을 육지 수형소(마포형무소)로 호송하는 업무를 수행

누구!”하면 딱 일어서면 뭐 5년이면 5년 징역을 언도한다! 이렇게 하면서 거기서 언도를 하대. 그 생각이 난다. 그때 확실히 내가 형무소 안에까지 가서 그 광경까지 봤으니까. 내가 본 것은 그것뿐이고 재판을 어디서 공판을 어디서 했는지는 모르지. 나는 호송만 배타서 목포 가서 열차 타고 서울까지 갔다온 거. 틀림없이 언도는 형무소 안에서 했다는거.

OO” 증언: 4·3 사건 당시 제주경찰서 경비과 순경으로 1948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육지 수형소 호송을 담당

형무소 안으로 가서 형무소 광장에데가 300명을 다 세워 놨는데 우리는 재판서류를 가지고 가서 형무소 소장에게 건네 주었어요. 300명의 재판 서류를, 건네주는데. 거기서 호명을 하면은 징역 몇 년 하면은 앉고, 또 호명을 하면은 벌떡 일어서서 징역 몇 년! 하면은 앉고

(300명은 목포형무소 마당까지 갈 때는 몇 년 형을 받았는지 모르고 간 것입니까?)

몰랐죠. 여기서 몇 년형이다, 몇 년형이다 애기를 않은 모양이라.